1977년 9월 20일 일본 오키나와 나하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지역의 유지인 부친과 외조모가 주일미군 기지에서 일하는 등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배경 차이, 성격 차이 등으로 다투다가 아무로가 4살 때 이혼을 한다. 이혼 후 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아무로는 매우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살면서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선물도 없고 용돈도 없는 등 궁핍했던 시절의 일화는 눈물겨울 정도. 어린 시절 아무로는 매우 조용하고 내성적이며 어둡다는 소리를 듣는 아이였다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같은 반 친구가 다니던 가수/탤런트 육성 학원인 오키나와 액터즈 스쿨에 놀러갔다가 원장 마키노 마사유키에게 스카웃 된다. 구경 왔던 아무로를 버스정류장[5]까지 쫓아가 어머니와 같이 오라고 말하고, 돈이 없어 학원을 다닐 수 없는 아무로를 특별장학생으로 대우해 공짜로 다니게 하는 등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 원장님의 신의 한 수 아무로네 집안은 학원을 다니는 버스비를 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해서, 아무로는 집에서 학원까지 왕복 3시간 거리를 걸어다녔다고 한다.

오키나와 액터즈 스쿨에 다니면서 오키나와 지역 방송에 출연하고 도쿄에서 오디션을 보는 등 연예인 활동을 시작한다. 같은 오키나와 액터즈 스쿨 학생들과 '슈퍼몽키즈' 를 결성하고 정기 공연을 하다가 1992년 2월 라이징 프로덕션(=現 비전팩토리)과 계약하고 3월 도쿄로 상경한다. 그 후 시무라 켄의 방송에 레귤러로 출연하거나 이벤트에 나가는 등 인지도를 쌓는다.

 

아무로 나미에의 진정한 전성기는 1995년 가을 EMI에서 에이벡스로 이적하면서 시작되었다. 10월 25일 코무로 테츠야의 프로듀스하에 첫 싱글 'Body Feels Exit' 를 발표하면서 유로비트 노선에서 벗어났고 이후 3년간 'Chase the Chance', 'Don't wanna cry', 'You're my sunshine' 등 5개의 싱글이 밀리언 싱글을 달성했다. 1996년 7월 첫 정규 앨범 'SWEET 19 BLUES' 는 300만장을 넘기는 대 히트를 기록하여 아무로의 앨범들 중 최고 판매량을 기록하였다.

위에서 쓴 것처럼 아무로 나미에의 전성기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아무로는 당시 10대 소녀들의 패션 리더가 되었고, 소녀들은 아무로를 따라한다며 다이어트를 하여 평균 몸무게가 2kg이나 줄었으며, 트레이드 마크인 태운 피부, 미니스커트, 통굽[8] 등의 엄청난 유행을 불렀고, 그녀를 따라한 팬들로 인해 갸루 패션이 크게 유행하였다. 이 사회적 파장은 언론은 '아무라' 라고 하였으며 경제학 용어에도 실려있다. 1996년 말 그녀는 일본 그랑프리상 최연소 수상자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오키나와 액터즈 스쿨에서 갈고닦은 탄탄한 기본기를 통해서 격렬한 안무 중에도 CD 음원에 버금가는 완벽한 라이브를 소화해낸다는 자체로 국내외로 가요계에 큰 파장을 일었다. 처음에는 립싱크가 아닌가 해서 몇 번이고 돌려봤지만 가사를 틀리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라이브였다는 사실에 그만 실력에 매료되어 팬으로 입문되는 사람도 꽤 많은 편이었다. 대표적으로 96년 치바 마린 스타디움 공연은 아무로 역대 최고의 라이브로 남아있지만, 특히 그 중에서 'Body Feels EXIT'은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공연으로 평가받고 있다.

1997년이 시작되면서 싱글 'CAN YOU CELEBRATE?' 가 발매되는데, 이 싱글은 아무로 나미에의 발라드 노래 중 최고의 히트곡이자 당시 일본 결혼식 테마송으로 불리는 등 200만 장 이상 팔렸다. 현재에도 아무로 발라드 곡 중에 탑 2위를 차지하고 있다. 7월 정규 앨범 'Concentration 20' 가 약 2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고, 7월과 8월에 걸쳐 여성 아티스트 최초의 돔투어를 성공시키면서 인기의 최정점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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