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약력

1979년 충암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진학하였다.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전두환에 대해 교내에서 모의재판을 열고 검사역을 맡아 전두환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이 모의재판 이야기가 교내외로 퍼지면서 한동안 강원도로 피해있어야 했고, 그 후 사시 2차에서 계속해서 낙방했다. 

 

어쨌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그 후 서른두 살의 나이로 1991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연수원 23기. 사법연수원 동기인 이정렬 전 부장판사[4]에 따르면 대단한 원칙주의자에 법덕후라 법대 교수와의 법리 논쟁에서도 지지 않는 학생이었고, 그런 성향 때문에 시험에도 안 나오는 법공부를 하다가 오히려 사법고시 합격이 늦어진 특이 케이스라고 한다. 성격 자체가 모르는 부분은 완벽히 이해할 때까지 파고드는 성격이었고, 독일어도 깊이 공부하는 등 사법고시보다는 법학 자체를 더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이라고

 

검사시절
1994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대구지방검찰청 검사를 시작으로 검찰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1996년에 춘천지방검찰청 강릉지청, 1997~1998년에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청에서 일하다가 1999년 김대중 정부 시절에 서울중앙지방검찰청으로 옮겼다.

1999년 김대중 정부에서 경찰 실세로 꼽혔던 박희원 치안감을 소환해서 수사했다. 소환한 지 단 하루 만에 자백을 받아냈다.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증거를 수집하고 심문을 했는지 박희원 치안감은 영장실질심사 등을 모두 포기했다고 한다.

2003년에는 참여정부의 측근 인사인 안희정, 강금원을 구속수사 하였다.[5]

2006년에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검찰연구관으로 있었으며, 현대자동차 비자금 사건을 맡았다. 당시 검찰총장에게 면담을 신청하고, 수사결과 정몽구 회장을 구속해야 한다'면서 동시에 사직서를 내밀었다. 이에 검찰총장은 고심 끝에 정몽구 회장을 구속하기로 결정하였다.

2008년에는 대전지방검찰청 논산지청장이 되었다.

부장검사시절
2009년 부장검사로 승진하면서 대구지방검찰청 특별수사부로 부임하였다. 그 후 대검찰청으로 복귀하여 범죄정보2담당관을 맡았고, 2010년에는 대검찰청 중수2과장, 2011년에는 대검찰청 중수1과장을 역임하는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2012년에는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특별수사제1부 부장검사 자리에 올랐다.

2013년 4월 18일,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 특별수사팀장으로 임명되었다. 수사과정에서 국가정보원을 압수수색하는 등 적극적으로 수사를 했다. 이 과정에서 상관이던 채동욱 검찰총장이 날아가고, 윤석열 본인도 국정원 직원들의 압수수색·체포 영장 청구 사실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사팀에서 배제됐다.


 

그러자 윤석열은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이 부당한 수사 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결국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공직선거법 위반과 국가정보원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징역 4년 자격정지 4년을 구형했지만, 공직선거법 위반은 결국 적용되지 않아, 원세훈은 1심에서 징역 2년 6월 집행유예 4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다.

이 1심 판결이 있은 지 한 달 뒤인 2013년 10월 21일, 윤석열은 전술한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관련 국정감사 증인으로 나와 수사 과정에서 외압이 심했으며 대놓고 "야당 도와줄 일 있냐"라는 질책을 받고는 이래선 조영곤 검사장님 밑에서 수사를 계속 할 수 없다라는 핵직구 증언을 했다, 이에 새누리당 측 위원인 정갑윤 의원이 "조직을 사랑하느냐, 사람에 충성하는 것 아니냐"라고 막말을 쏟자, “저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 이런 말씀을 드린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박근혜 최순실게이트를 담당하면서


그러던 중 2016년 12월 1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한 특별수사를 담당하는 박영수 특별검사로부터 특검팀의 수사팀장[9]으로 지명되었다. 본인은 자신이 이 정권에 처음으로 상처를 냈기 때문에 또 상처를 내는 것은 좋지 않다며 고사했지만 박영수 특검이 직접 나서서 합류를 종용하여 합류했다고.[10] 위에도 말했듯 특검보 레벨의 커리어를 가지고 있지만 이번 특검법에 '1년 내로 공무원을 한 사람은 특검보를 할 수 없다.'라고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파견 검사의 신분으로 특검팀에 합류했다. 이 합류는 박지원, 황교안 등과의 친분관계 등의 사유로 박영수 특검이 그동안 주목만 받았지 별 성과가 없었던 수많은 역대 특검팀과 다를 바 없을 거다라는 비관적 여론을 180도 돌리는 신호탄이 되었고, 인터넷이나 진보 측에서는 윤석열 검사가 왔으니 이번에는 다르다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2017년 5월 19일, 문재인 대통령은 돈봉투 만찬 사건의 핵심 인물인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의 후임으로[13] 윤석열 검사를 임명하였다


안희정 충남도지사의 약력

1965년 5월 1일[4]에 2남 3녀 중 셋째(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충청남도 논산군 출신이다.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름인 '희정'. 국가주의가 팽배하던 시절,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매우 좋아하시던 부친께서 희[5]자 돌림의 항렬자를 쓰고 박 전 대통령의 이름인 정희(正熙)를 뒤집어 희정(熙正)으로 지었다고 한다.참고 어린 시절의 본인을 박정희 유겐트로 표현하며 꿈도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역시 어린 시절의 안희정이 체격도 좋고 어릴 적부터 탁구, 야구 등 운동에 재능이 있는 것을 보며 육군사관학교에 가길 원했다고 한다.[6] 사실 출신지부터가 범상치 않다...

 

중학교 때 함석헌의 씨알의소리, 러시아 혁명사를 읽고 감명을 받은 것과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5.18 민주화운동을 보고 큰 정신적 충격을 받은 뒤 학생 운동에 뛰어들었다.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결심을 한 것은 장폴 사르트르의 책 구절 중 '지식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창녀다'를 읽고 나서였다고 한다. 학력 과정이 묘한데, 고등학교 1학년 때 학도호국단 연대장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충남대 재학생들과 같이 학생운동을 하다 잡혀서 몽둥이 찜질당하기도 했다 한다. 학교가 문제 학생들을 삼청교육대에 보내도록 하라고 지시를 받았으나 교장에게 "문제학생을 학교가 교화시켜야지, 왜 삼청교육대에 보내는가?"라고 항의하다 위의 불온 서적 문제까지 겹쳐서 제적 처분을 받았다고. 고등학교 1학년 때 교과서를 전부 팔아버리고 사상계 등의 잡지와 사회과학 서적만을 읽었다고 한다.


 

이후 고향에 내려가 농사일이나 돕고 있었는데, 가을 추수가 한창일 때 아버지가 갑자기 '너 고등학교 안가면 내가 죽겠다.'는 식으로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 앞서 안희정의 아버지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매우 좋아했다고 서술했듯 집안 분위기가 상당히 보수적이었고,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한 안희정 본인도 전통적인 효(孝)를 중요시하는 사상이 뿌리깊게 자리잡았던 터라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아버지에 뜻에 순순히 따라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에 위치한 성남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학교에 입학한 지 채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부모님을 집요하게 설득하여 결국 얼마 가지않아 다시 자퇴하고 만다. 참조 고등학교를 자퇴한 뒤 안희정은 본인의 누나가 야학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었던 제일교회의 '형제야햑' 에서 청계피복 노동자들과 교류를 하기 시작했는데, 혁명을 하겠다는 막연한 생각만 있을 뿐 학생도, 노동자도 아닌, 말 그대로 백수나 다름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조바심을 느끼게 되었다. 일단 혁명은 해야겠으니 혁명 서클에 가입을 하려고 했지만, 당시 혁명 서클은 대부분 대학생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도 못한 17살 청소년을 받아주는 곳은 한군데도 없었다고 한다. 이에 안희정은 독특하게도 학생 운동을 하겠다는 목적으로(...) 검정고시를 통해 1983년 고려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고대에 간 이유도 학생운동을 더 열심히 하기 위해서라고[7]. 처음에는 재수종합반을 다니다가 3개월 다니고 때려치우고 국영수에서 150점 만점, 암기과목 170점에서 반 정도 맞고 체력장에서 20점 만점을 받으면 고려대 정도는 갈 수 있겠지 싶어서 독학했다고 한다. 당시 암기과목이 4개라 사탐 사회경제, 한국지리는 자신있는 과목이라 열심히 풀고 나머지 두 과목은 한 번호로 밀었다고.. 수학은 다른 거 안하고 정석만 2번!팠다고 한다. 시간도 많이 없고 하여 7달 중 2달 가량 밤을 새가며 국영수만 팠다고 한다. 결과는 대입시험에서 만점 340점 중 270점을 맞으며 고려대 철학과 합격.

하지만 어디까지나 학생 운동만을 위해 입학한 대학교였으니 학부 과정을 충실히 공부했을리 만무하고, 오로지 지하 서클 활동에만 전념하는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후 운동권 생활을 이어가다 1987년, 1988년 반미청년회 사건으로 수감되면서 제적되었고, 출소 이후 정치에 입문하면서 대학은 계속 쉬게 되었다. 그리고 1988년에 두번째로 수감되어 악명높은 남산 안기부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게 되면서 안희정의 인생에 크나큰 변화가 생기게 된다. 물론 육체적인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로웠지만[9], 청년 안희정을 무엇보다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고문 경찰의 심문이었다. 취조실에서 안희정에게 "그래, 네가 혁명 해서 권력 잡았다고 치자, 그럼 너 농업정책 어떻게 할껀데?" 하는 식으로 국정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질문을 낱낱이 던졌는데, 안희정은 저런 기초적인 질문에 변변한 답변도 하지 못했고, 본인이 가지고 사상이라는 것은 그저 '전두환', '파쇼', '반미' 라는 세가지 단어밖에 없다는 사실만을 뼈저리게 느끼고 만다. 육체에 이어 정신까지 철저하게 패배한 안희정은 결국 함께 학생 운동을 하던 동료들의 이름을 자백할 정도로 무너져 내렸지만,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면서도 1년간의 수감생활 동안 자신의 이상을 끝없이 돌아보며 공부 하는[10] 시간을 가지게 된다. 현재까지도 극단적인 수단을 고수하는 NL계열 인사들과는 달리 젊은 나이임에도 원숙한 정치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이후 2001년 당시 노무현 전 의원의 보좌관을 맡으면서 다시 정계로 복귀했다.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와 함께 좌희정 & 우광재라고 불릴 만큼 노무현 전 대통령을 최측근에서 보좌했었지만 정작 참여정부 하에서는 별다른 공직을 맡지 못했다. 2002년 대선 관련 선거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아서 공직을 맡을 상황이 아니었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은 안희정의 출판기념회 축사 영상을 찍으면서 "내 대신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다 했죠. 나는 뭐 엄청난 빚을 진 것입니다."라고 언급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시로 대선자금을 총대맸다지만 어쨌든 1심에서 징역 2년 6월 및 추징금 13억1천만원이 선고됐으며 2심에서 징역 1년 및 추징금 4억9천만원으로 감형되었고 대법원이 이를 확정하면서 실형을 살게 되었다. 자세한건 안희정/비판과 논란 참조.

당시 재판이 인상적인데, 최후 진술의 경우 보통 감형을 위한 변명으로 일관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안희정은 "자신을 엄벌에 처해서 승자도 처벌받는다는 교훈을 남게 해달라."라고 상상을 뛰어넘는 최후진술을 남겼다. 또한, 감형도 없이 형기를 채우고 만기출소했다

현재 •민선 6기 충남도지사로서 시도지사 직무평가에서도 꾸준히 상위권을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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